자녀를 위한다는 말은 언제부터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되었을까. 드라마 〈펜트하우스〉는 부모의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 얼마나 많은 욕망과 불안, 그리고 왜곡된 선택이 쌓여왔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 속 부모들은 하나같이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을 반복하지만, 그 말의 끝에는 언제나 비교, 경쟁, 불안이 따라붙는다. 학벌과 계급, 성공이 곧 생존이 된 사회에서 부모의 욕망은 자연스러운 본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묻는다. 그 욕망이 정말 아이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부모 자신의 결핍과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선택이었는지를. 〈펜트하우스〉는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 부모의 사랑이 언제, 어떻게 폭력으로 변질되는지를 드러내며, 시청자에게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아이의 인생을 대신 설계할 권리가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서론: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이 위험해지는 순간
펜트하우스는 자극적인 전개와 극단적인 인물 설정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지만, 그 중심에는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 놓여 있다. 바로 ‘부모의 욕망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드라마 속 부모들은 하나같이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하고 싶고, 실패 없이 안전한 길을 걷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 자체는 결코 낯설지 않다. 오히려 많은 부모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에 가깝다. 그러나 〈펜트하우스〉는 그 사랑이 언제부터 아이의 삶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아이를 옥죄는 굴레로 변해버렸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은 반복될수록 점점 무거워지고, 그 말 속에는 부모 자신의 불안과 결핍, 사회적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섞여 들어간다. 아이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부모의 욕망을 증명하는 결과물처럼 다뤄진다. 이때 사랑은 존중이 아니라 통제가 되고, 관심은 배려가 아닌 감시로 변질된다. 드라마는 극단적인 사건을 통해 이 과정을 보여주지만, 그 감정의 뿌리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입시와 경쟁, 계급과 성공이 삶의 기준이 된 사회에서 부모의 욕망은 점점 더 정당해 보이고, 그만큼 아이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펜트하우스〉의 서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며, 시청자에게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 존재인가.
본론: 욕망이 아이의 삶을 대신 선택할 때
〈펜트하우스〉의 본론은 부모의 욕망이 어떻게 아이의 인생을 잠식해 가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 속 부모들은 처음부터 악의적인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출발점은 언제나 불안이다.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지금의 지위를 잃을까 봐, 아이가 자신의 삶처럼 실패할까 봐 두려워한다. 이 불안은 곧 통제가 되고, 통제는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에게 강요된다. 어느 학교를 가야 하는지, 어떤 무대에 서야 하는지, 누구와 어울려야 하는지까지 부모가 대신 결정한다. 아이의 재능이나 성향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겨야 한다’는 결과뿐이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점점 선을 넘는다. 규칙을 어기는 행동조차 “아이를 위해서라면” 정당화되고, 타인의 상처는 경쟁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희생으로 치부된다. 문제는 이 모든 선택이 아이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아이는 선택하지 않았지만, 실패의 책임과 죄책감은 고스란히 짊어진다. 드라마는 이 구조를 통해 부모의 욕망이 얼마나 쉽게 사랑의 얼굴을 쓰고 폭력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부모 스스로가 자신을 폭력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끝까지 “아이를 위해서였다”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아이의 시선에서 보면 그 사랑은 숨 막히는 감옥에 가깝다. 꿈을 말할 자유도, 실패할 권리도 허락되지 않는다. 〈펜트하우스〉는 이러한 관계가 결국 파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음을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욕망이 커질수록 부모와 아이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고, 사랑은 신뢰가 아닌 두려움 위에 세워진다. 이 본론의 핵심은 분명하다. 부모의 욕망이 아이의 삶을 대신 선택하는 순간, 그 관계는 더 이상 보호가 아니라 지배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결론: 사랑과 욕망의 경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펜트하우스〉의 이야기가 끝에 다다를수록 시청자는 하나의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부모의 욕망은 과연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은 그 욕망을 얼마나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드라마는 극단적인 사건과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욕망이 통제되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은 관계가 파괴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부모들이 끝까지 자신을 악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늘 아이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사랑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그 사랑은 보호가 아니라 부담이 되고, 응원이 아니라 압박이 된다. 이 지점에서 〈펜트하우스〉는 분명한 메시지를 남긴다. 아이의 인생은 부모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진짜 사랑은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라는 점이다. 드라마 속 비극은 단지 허구의 과장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충분히 반복될 수 있는 구조를 반영한다. 경쟁과 비교가 일상이 된 사회에서 부모의 욕망은 쉽게 선의를 가장하고, 그 결과 아이의 삶은 점점 숨 쉴 틈을 잃는다. 결국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 모두를 향해 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가. 〈펜트하우스〉는 화려한 설정 뒤에 이 불편한 질문을 남기며, 진정한 사랑의 기준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