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글리치〉 - 왜 ‘외계인’보다 믿음을 이야기했을까

by ideas57437 2026. 1. 16.

**글리치**는 외계인 실종이라는 강렬한 설정으로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중심에는 SF적 미스터리가 아닌 ‘믿음’의 문제가 놓인다. 이 드라마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추적하는 과정보다,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회와 그 속에서 고립되는 개인의 심리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진실을 말한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고, 경험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은 배제되는 구조 속에서 작품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타인의 말을 의심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밀어내고 있는가. 이 글은 〈글리치〉가 왜 외계인보다 믿음을 핵심 주제로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오늘을 사는 시청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한다.

 

〈글리치〉 - 왜 ‘외계인’보다 믿음을 이야기했을까
〈글리치〉 - 왜 ‘외계인’보다 믿음을 이야기했을까

 

서론: 외계인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불신’이다

〈글리치〉는 외계인 실종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시작하지만, 첫 화부터 시청자가 마주하게 되는 감정은 공포보다 불안에 가깝다. 그 불안의 정체는 보이지 않는 존재 때문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 누군가 이상한 경험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가볍게 무시되고, 설명되지 않는 사건을 추적한다는 이유로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되는 장면들은 이 드라마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분명히 드러낸다.

 

〈글리치〉에서 외계인은 이야기의 출발점일 뿐, 진짜 중심에는 ‘믿지 않는 사회’가 있다. 이 작품은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보다, 진실이 말해지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집중한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곧바로 의심의 대상이 되고, 그 의심은 사건보다 사람을 먼저 공격한다. 드라마는 이 과정을 매우 일상적으로 그린다. 경찰이나 언론, 주변 인물들의 반응은 극단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그럴 리 없다”, “네가 예민한 거 아니냐” 같은 말들은 누군가의 경험을 단번에 지워버린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믿어주지 않는 태도 자체가 한 사람을 고립시키는 구조라는 점이다. 〈글리치〉의 서론이 인상적인 이유는, 외계인을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사람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묻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쉽게 판단을 내려버리는지, 그리고 그 판단이 누군가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이 드라마는 조용히 보여준다.

 

그래서 초반부부터 형성되는 긴장감은 미스터리의 흥미보다 인간 사회에 대한 불편함에서 나온다. 〈글리치〉는 이 불편한 감정을 통해 시청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며, 외계인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무엇인지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본론: 진실을 말하는 순간, 사람은 왜 먼저 의심받는가

〈글리치〉의 본론은 외계인의 정체를 밝히는 추적극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실을 말한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고립되는가’를 집요하게 보여주는 서사에 가깝다. 주인공이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상황은 해결로 향하기보다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회는 설명되지 않는 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그것을 말한 사람을 먼저 문제 삼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 진실은 언제나 불편한 존재이며, 그 불편함은 개인에게 전가된다.

 

작품은 이 과정을 매우 현실적인 방식으로 그린다. 외계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인물의 말은 ‘객관성’을 잃는다. 경험은 사실이 아니라 착각이나 트라우마로 치환되고, 사건은 외부의 위협이 아닌 개인의 심리 문제로 축소된다. 이때 사회는 안도한다. 진실을 믿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글리치〉는 바로 이 지점을 통해 현대 사회가 진실을 다루는 방식을 날카롭게 비춘다. 설명되지 않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루기 어려운 것일 뿐인데 우리는 너무 쉽게 그것을 배제해왔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기억의 불신’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본 것, 느낀 것, 겪은 것마저 의심받는 상황에 놓인다. 반복되는 부정 속에서 인물은 외부의 의심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까지 떠안게 된다.

 

이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다. 진실을 증명해야 하는 싸움이 아니라, 정상임을 증명해야 하는 싸움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이 심리적 압박을 통해, 불신이 개인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하지만 〈글리치〉는 고립만을 그리지 않는다. 같은 경험을 공유했거나, 비슷한 이유로 배제된 인물들이 서로를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된다. 이들은 완벽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대신 “네 말을 믿는다”는 태도를 나눈다. 작품은 이 믿음의 연대가 진실을 증명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임을 강조한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지 않아도, 누군가의 경험을 존중하는 순간 인간은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글리치〉의 본론은 외계인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아니라, 진실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를 해부하는 이야기다. 진실이 사라지는 순간은 언제나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될 때가 아니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때라는 사실을 이 드라마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낸다.

 

결론: 글리치가 남긴 가장 무서운 질문은 ‘우리는 사람을 믿고 있는가’이다

〈글리치〉가 끝난 뒤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감정은 미스터리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향한 불편한 질문이다. 외계인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진실을 말한 사람들이 끝까지 의심받고 배제되는 과정이다. 이 드라마는 공포를 자극적인 장면으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대신 믿지 않는 태도가 사람을 어떻게 고립시키는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 쉽게 지나쳐온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작품이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진실은 언제나 명확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설명되지 않는 경험 역시 누군가에게는 분명한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는 불확실성을 견디기보다, 그것을 말한 사람을 문제 삼는 쪽을 선택해왔다. 〈글리치〉는 이 선택이 얼마나 잔인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경험을 부정당하는 순간, 인간은 관계에서 밀려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이때 공포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공포는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벽한 설명이나 확실한 증거가 없어도, 누군가의 말을 존중하고 귀 기울이는 순간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다. 작품 속 연대는 거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다. 〈글리치〉는 외계인을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진실을 모두 알 수는 없어도, 타인의 경험을 함부로 부정하지 않는 선택만큼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드라마는 끝까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